쉬어가기/시와 삶

한국의 명가 이야기

좋은 뉴스 2009. 2. 14. 21:14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 [한국의 명가 명택]


 


    


경주 최부잣집 9대 진사 12대 만석꾼 배출한 재력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200년 전통의 가훈이다.  


 


부불삼대(富不三代,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란 말이 있다. 최근 들어 우르르 무너지는 재벌들을 보면서 이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100년은 유지될 줄 알았던 한국의 재벌들이 허망하게 넘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부자가 3대를 넘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세간사(世間事)의 이치를 절절히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의 부는 이루는 것도 빠르지만 망하는 것도 신속하다. ‘졸부(猝富)는 졸망(猝亡)’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싶다.




과연 3000리를 내려가는 백두대간의 유장한 산줄기처럼 3대를 훌쩍 뛰어넘어 오래가는 부자가 한국에는 없단 말인가! 수십, 수백억원을 삽시간에 벌어 당당한 사업가 행세를 하던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경주 최(崔)부잣집을 생각하게 된다. 최부잣집은 유장한 부자, 즉 졸부가 아닌 명부(名富)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집안이다.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연이어 만석을 한 집으로 조선팔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집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좀처럼 깨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기록일 성싶다.




3대 부자도 어려운데 어떻게 12대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면 반드시 집안 나름의 경륜과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품고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늦은 오후, 경주 교동(校洞) 69번지에 주소를 둔 최부잣집에 도착했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도 교동 69번지는 특별한 장소다. 원래 이 터는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 오른쪽 옆으로는 신라 신문왕 2년부터 자리잡은 계림향교(鷄林鄕校)가 있고, 뒤편으로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어려 있는 계림(鷄林)이 자리잡고 있다. 또 왼쪽 뒤편으로는 내물왕 무덤을 비롯한 5개의 커다란 봉분이 작은 동산처럼 누워 있고, 거기서 좀더 왼쪽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살던 재매정(財買井)이 있다. 이렇게 최부잣집은 주위가 온통 신라 신화와 역사의 자취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집터 자체가 박물관 분위기를 풍기는 듯하다.




최부잣집의 가훈 


 


최부잣집에서는 대대로 가훈처럼 지켜내려온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를 차근차근 곱씹어보면 최부잣집의 향기가 배어 있다.




‘첫째, 진사(進士)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은 한마디로 정쟁(政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진사라는 신분은 초시(初試) 합격자를 가리키는데, 벼슬이라기보다는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면 ‘양반 신분증’이고나 할까.


최씨 집안은 진사는 유지해도 그 이상을 넘어서는 벼슬은 꺼렸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까워진다는 영국 속담처럼, 조선시대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쟁에 휩쓸리기 쉬웠다. 한번 당쟁에 걸려들어 역적으로 지목되면 남자는 사약을 받거나 아니면 유배형을 당했고, 그 집안 여자들은 졸지에 남의 집 종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것이다. 아마도 최씨 집안에서는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한다는 것은 멸문지화에 접근하는 모험으로 여겼던 것 같다.




최부잣집의 둘째 원칙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다. 만석은 쌀 1만 가마니에 해당하는 재산이다. 돈이라는 것은 한번 모이면 가속도가 붙는 ‘이상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최부잣집은 만석 이상의 재산 불가 원칙에 따라 나머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였다. 환원 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방법이었다. 당시의 소작료는 대체로 수확량의 7∼8할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최부잣집은 남들같이 소작인들로부터 7∼8할을 받으면 재산이 만석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그 소작료를 낮추어야만 했다.


 


예를 들면 5할이나 그 이하로도 받았다. 이 정도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주변 소작인들은 앞을 다투어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기들은 혜택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저 집이 죽어야 내 집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집이 살아야 내 집도 좋아진다는 상생(相生)의 현장이 구현된 것이다. 사촌이 논 사면 내 배 아프다는 속담과는 전혀 다른, 진정으로 아름답고 통쾌한 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둘째와 같은 맥락의 가훈이 넷째 ‘흉년에 논 사지 말라’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어 아사 직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우선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논값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흰 죽 한끼 얻어먹고 논을 내놓았다고 해서 ‘흰죽 논’이란 말도 있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쌀을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들로서는 이때야말로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상극(相剋)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것을 금했다.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자가 흉년에 논 사면 나중에 원한을 사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다. 헐값에 논을 넘겨야만 했던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두 수 앞만 내다보면 그 원한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것은 불문가지다. 최씨 가문은 도덕성과 아울러 고준한 지혜를 가졌던 듯하다.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삼강오륜과 예를 강조하다 보니 사회분위기가 자칫 경직될 수 있었다. 그 경직성을 부분적이나마 해소해주는, 융통성 있는 사회 시스템이 바로 과객을 대접하는 풍습이 아니었나 싶다. 요즘같이 여관이나 호텔이 많지 않았던 사회에서는 여행을 하는 나그네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양반집이나 부잣집의 사랑채에서 며칠씩 또는 몇 달씩 머물다 가는 일이 흔했다.




이들 과객들의 성분은 다양하였다. 몰락한 잔반(殘班)으로 이 고을 저 고을의 사랑채를 전전하며 무위도식하는 고급 룸펜이 있는가 하면, 학덕이 높은 선비나 시를 잘 짓는 풍류객이 있고, 무술에 뛰어난 협객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풍수와 역학에 밝은 술객들도 있어서 주인집 사람들의 사주와 관상을 보아주기도 하고, ‘정감록’이란 참서로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주인양반은 온갖 종류의 과객을 접촉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여행이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이들 과객집단은 다른 지역의 정보를 전해주는 메신저 노릇을 하였으며 여론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최부잣집에서는 이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자.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천석 정도. 이 가운데 1천석은 집안에서 쓰고, 1천석은 과객을 접대하는 데 사용하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썼다고 한다. 1년에 1천석을 과객접대용으로 썼다고 하니 당시의 경제규모로 환산해 보면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최부잣집에서는 과객을 접대하는 데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과객 중에 상객(上客)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매끼 ‘과매기’ 1마리를 제공하고, 중객(中客)에게는 반마리, 하객(下客)에게는 4분의 1마리를 제공하였다. 과매기는 전라도나 충청도에는 없는 경상도 특유의 음식으로 포항, 울산 지역에서 나는 마른 청어를 가리킨다. 현재는 마른 청어 대신에 마른 꽁치를 과매기라고 부르는데, 주로 날씨가 추운 겨울에 제 맛이 난다.




최부잣집에 과객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00명까지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에서 수용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설 때는 최부잣집 주변에 있는 초가집(노비들이 사는 집)으로 과객들을 분산 수용하였다고 한다. 부득이 노비집으로 과객을 분산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그 과객에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과매기 1마리와 쌀을 주어서 보냈다.




과객이 최부잣집에서 쌀과 과매기를 가지고 주변의 노비집으로 가면, 그 노비집에서는 무조건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도록 룰이 정해져 있었다. 과객들을 접대하는 대가로 노비들은 소작료를 면제받았다. 최부잣집에서 50∼60리 멀리 떨어져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제대로 내야 했지만, 인근의 노비들은 과객 대접한다는 공로로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100리 안에 굶는 이 없게 하라




밤을 지내고 떠나는 나그네는 빈 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과매기 한 손(2마리)과 하루분 양식, 그리고 노자를 몇 푼 쥐어 보냈다. 어떤 과객에게는 옷까지 새로 입혀서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최부잣집이 과객대접에 후하다는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입 소문을 타고 조선팔도로 퍼졌다. 강원도 전라도는 물론 이북 지역에까지 최부잣집의 명성이 퍼졌다고 한다.




이는 결국 최부잣집의 덕망으로 연결되었다. 중국에 3천식객을 거느렸다고 하는 맹상군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1년에 1천석의 쌀을 과객에게 대접하는 최부자가 있었던 셈이다. 최부잣집의 덕망은 여섯째 원칙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데서도 나타난다. 경주 교동에서 사방 100리라고 하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고, 남쪽으로는 울산까지, 북으로는 포항까지의 영역이다.




주변이 굶어 죽고 있는 상황인데 나 혼자 만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부자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작수입 가운데 1천석을 주변 빈민구제에 사용한 것도 이런 차원이다. 불교의 ‘유마경’에 유마거사가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중생이 모두 아픈데 내가 어찌 안 아플 수 있겠느냐!”




다섯째 원칙은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 옷을 입어라’다.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었다. 재산 관리의 상당 권한을 여자가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 정신이 중요하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숟가락도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백동 숟가락의 태극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 과객 대접에는 후했지만 집안 살림에는 후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씨 집안의 어느 며느리는 삼베 치마를 하도 오래 입어 이곳저곳이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는데, 서 말의 물이 들어가는 ‘서말치솥’에 빨래를 하기 위해 이 치마 하나만 집어넣으면 솥이 꽉 찰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너무 많이 기워 입는 바람에 물에 옷을 집어넣으면 옷이 불어나서 솥단지가 꽉 찼다는 말이다. 최부잣집 여자들의 절약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화다. 이상 여섯 가지 원칙이 최부잣집의 제가(齊家)하는 철학이라면, 육연(六然)이라고 하는 수신(修身)의 가훈도 있었다.


 


육연은 다음과 같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여기서 ‘연’의 사전적 의미는 ‘그러하다’ ‘그렇다고 여기다’인만큼 전체적으로 관용, 긍정, 초연의 뜻이 담겨 있다.




최부잣집의 장손인 최염씨(崔炎, 68)는 어렸을 때부터 매일 아침 조부 방에 문안을 가면 조부님이 보는 데서 붓글씨로 육연을 반드시 써야만 했다고 술회한다. 어려서부터 군자다운 행동을 하도록 철저히 교육받았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최부잣집의 가훈을 음미하면서 나는 로마 천년의 철학이 생각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가 천년을 지탱하도록 받쳐준 철학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는 것이다. 이를 번역하면 ‘혜택받은 자들의 책임’ 또는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들이 솔선수범하여 최전선에 나가 피를 흘리는가 하면 공중을 위해 금쪽 같은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곤 하였다. 귀족은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여기서 로마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나왔다.




시오노가 ‘로마인 이야기’ 전체를 통하여 몇 번이고 강조한 대목은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이것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더 높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게 시오노의 주장이다. 여기서 도덕적 의무를 통해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였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최부잣집의 원칙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도덕적 실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보람을 증가시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삶의 질은 의미와 보람에 달려 있는 것 아니던가.




한국사람들은 이를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이라 하였다. 이는 요즘의 민법이나 형법보다 훨씬 강력한 윤리적 기제였으며 동시에 사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이끄는 철학이었다. 최부잣집의 원칙들은 바로 한국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부잣집의 고향인 경주와 로마는 유사하다. 사실 세계 역사에서 1000년 수명을 유지한 나라는 신라와 로마제국을 빼면 없다. 물론 그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신라와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로마가 월등하지만, 그 유지된 시간만 놓고 볼 때는 신라와 로마는 천년제국이라는 점에서 대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철학과 경륜은 그 세계의 체험 내지 경험의 두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륜은 책상 위에서 습득한 건조한 지식에서 나오기보다는 치열한 실전 체험에서 나온다. 체험이 빈약하면 철학도 빈약하다. 그래서 두터운 역사와 전통은 큰 나무의 깊은 뿌리가 된다.




그래서 천년 고도 경주에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낸 명가(名家)가 지켜온 가훈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고, 천년 제국 로마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나온 것도 필연인 것 같다. 육연(六然)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홍세화씨가 자주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톨레랑스(tolerance)’다. ‘관용’ 또는 ‘용인’으로 번역되는 톨레랑스는 프랑스 정신이라고 할 만큼 프랑스인들에게 체질화되어 있다고 한다. 톨레랑스는 남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19세기까지 프랑스 파리가 세계의 수도 노릇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온갖 다양성을 넉넉하게 수용할 줄 아는 톨레랑스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가 언뜻 볼 때는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난잡으로 흐르지 않고 세련된 문화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톨레랑스라는 것이다. 나는 톨레랑스를 홍세화씨의 책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배웠는데, 최부잣집의 액자에 걸려 있는 육연을 보면서 조선 선비의 톨레랑스를 느꼈다.




이를 종합하면 최부잣집의 수신(修身)은 프랑스의 톨레랑스요, 제가(齊家)는 로마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재물과 벼슬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인간일진대, 보통 인간이 이 욕망을 제어하고 절제하면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삶에 대한 통찰력에서 지혜가 나오고 이 지혜를 후손에게 전승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종교의 계율로 나타나는데, 그 계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최부잣집 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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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중략)


 


글 /  조용헌 [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